▲ 안일호장(安逸戶長) 묘소 측면

 

세상에서 씨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래정씨가 세가(世家)요 대성(大姓) 이라 하고 풍수지리가는 또 화지산의 정묘(鄭墓)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당자리라고 들 한다. 대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도록 천여 년 간을 봉분(封墳)이 뚜렷하며 제사 를 받듬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자손이 길이 이어 번성하며 공경대부들이 국사와 족보 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이 무덤이 덕을 심은 보답에서 비롯되었도 다. 보게나! 뿌리가 깊어야 가지가 무성하고 냇물이 넉넉하면 멀리 흘러 가나니 이 어찌 그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될까 보냐!

 

▲ 안일호장(安逸戶長) 묘소 전경(全景)

 

▲ 안일호장(安逸戶長) 묘소 후면

무덤의 앞에 본디 나즈막한 빗돌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낡았으므로 1711년 (肅宗37년 辛巳)에 20대손 감사 시선(監司是先)이 밀양부사일 때 돌을 깎아 비석을 고쳐 세우면서 그 뒤쪽에 간략하게 사적(事蹟)을 기록했는데 그 글을 살피니「公의 휘諱)는 문도(文道)이며 정씨의 시조이고 무덤은 동래 화지산 정남향(正南向)이요, 윗 세대를 고증 할 문적(文籍)이 없더니, 효종 때(1656~1659년)경기도 장단 고을 송림 산아래 옛 무덤이 허물어져 지석이 나타났는데 예부상서 문안공 정항(鄭沆)의 무덤 이라」새겨 있었다. 거기에「그 선조는 동래 인이고 아버지 휘(諱) 목(穆)은 섭대부경 이며 할아버지 휘 문도(文道)와 증조부 휘 지원(之遠)은 모두 본군(本郡)의 호장(戶長) 이라, 항(沆)은 23세인 고려 숙종 임오(110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인종 병진(1136, 紹興 6年)년에 별세하였고 항은 형이 세 분인데 제(濟)는 일찍 돌아가시고 점(漸)과 택(澤)은 모두 문장과 재간으로써 조정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다.」라고 했으니 公의 연대(年代)는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된다. 또한 그는 매우 조심성있고 부드럽고 무 던하며 거짓없이 정성스러운 덕행과 겸손하고 공손하며 꾸밈없이 검소한 모습은 한 씨족의 시조되시고 후손들이 본받기에 충분하겠으나 전기(傳記)가 없어져서 전해지지 아니하고 다만 동래 군지(東萊郡誌)에「公이 현리(懸吏)로 있다 가 나이 많아 집에서 지낼 때마다 초하룻날에 나팔 부는 소리를 들으면 고을 원이 조회를 시작하는 줄 알 고 문득 뜰에 내려가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하니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또 그 군지(郡誌)에 의하면「公이 돌아가시어 장사지내려 할 때 상여가 이 화지산 에 이르니 범이 쭈그리고 앉아 눈이 녹은 이상한 자리가 있으므로 거기에 장사지냈 다.」라고 했고 이제껏 온 고을이 모두 정호장(鄭戶長)의 이름을 알고 있다 했으며 그 무덤을 가르켜 정묘(鄭墓)라고 부르며 동네 아이들이나 나무꾼이 들어가지 아니하 니 무덤 가의 나무들이 무성하게 잘자라고 지역이 남쪽의 바닷가에 있어 여러 차례 난리를 겪었지만 이 곳이 침노당하지 아니했으니, 이 어찌 公이 덕을 베풀고 선행을 두터이 한 까닭이 아닐까 보냐!

 

족보를 펴 보면 公의 손자가 네 분인데 시랑 제(侍郞濟)와 어사잡단 점(御史雜端漸) 은 자손이 전하지 아니하고 항(沆)은 곧 묘지문(墓誌文)의 문안공을 이르는데 또한 자손이 전하지 아니하며 오직 문하첨의 찬성사 급사중인 택(澤)이 고려조에 유명하여 인종 11년 계축(1133년 9월)에 예빈소경으로 사신이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 온 것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公의 자손은 찬성공 택에 이르러 더욱 창성하여 자못 전국에 두 루 퍼져 살고 대대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나타나 왕실을 돕고 나라를 위하여 세록 지신(世祿之臣: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이 된 자가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대저, 거짓 없이 삼가는 것(忠謹)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그 끼친 메아리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았으므로 세상사람들이 이것을 정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家風)이라 고 한다.

 

ㅡ 위 글은 묘비 문(墓碑文)에서 인용하였음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