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보(光輔)
1457년∼1524.
자(字)는 운지(雲之)요 직함(職啣)은 행 창원도호부사(行昌原都護府使)이고, 이조판서(贈吏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동래군 난종(蘭宗)의 장남이다. 公이 어려서부터 과거(科擧) 공부를 익혀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벌(門閥)의 음덕으로 관직에 나아가 공적(功績)를 쌓아 여러 차례 승진 되어 통정대부(正三品)의 품계(品階)에 이르렀다. 公의 중앙관직으로는 와서별제에 임명되고 주부(主簿) 벼슬을 세번 했으니, 즉 사제감·종부시 군자감과·사헌부 감찰에 두번 임명되었다. 장원서 별제·평시 서령 장예원 사의·종친부 전부 등을 역임하시고 첨정이 되어 세가지 직책에 임명되시니 장악원예빈시 제용 감과 통덕원 봉례이고 외직(外職)으로는 연산현감과 평양부 판관이고, 군수를 역임하신 것이 다섯 번이니, 즉 정선 풍기 금산·순창·초계요. 부사(府使)를 역임하신 것이 두 번이니 창원과 연안이다.
公의 품계가 네 번이나 바뀌어 당상(堂上)의 품계에 오르는 동안 거쳐 온 고을이 아홉 곳이다. 公은 타고난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시어 관직에 계실 때 공사(公私)가 분명하여 사사로운 일에는 스스로 뒤돌아보지 않으시니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빌미로 헐뜯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소신에 대하여 조금도 후회하지 않으셨다.
公께서 벼슬을 그만둘 나이가 아닌데도 관직을 버리고 의령 도굴산 아래에 물러나 거처하면서 여생을 보내시다가 1524(中宗19)년 3월 9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68세이다. 아! 슬프다. 여러 상주들이 운구를 받들어 광주 성달리에 장사지내니 선영이 계신 곳이다.
公의 배위는 전의이씨(全義李氏) 대호군 삼격(大護軍三格)公의 따님으로 公보다 26년 전 1499(燕山5)년 돌아가셨다. 슬하에 四男四女를 두셨다. 묘소는 화성군 반월면 속달리 친영(親塋) 뒤 자좌원(子坐原) 쌍분(雙墳)이며, 묘갈(墓碣)은 1525(中宗20)년에 수립(竪立)하였고, 좌찬성(左贊成) 이행(李荇)이 글을 짓고 형조참판(刑曹叅判) 성세창(成世昌)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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