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원(期遠 )
1559∼1597 자(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현산(見山). 아버지는 별좌(別坐) 상신(象信)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부정(副正) 경(璟)의 딸이다. 1585년(선조1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가 호조·형조·공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1589년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사은사 신점(申點)과 상의하여 면연은(免宴銀) 45냥 및 쓰고 남은 여비를 절약하여 궁각(弓角) 1천 3백 8편과 염초(焰硝) 2백 근을 수입하였고, 외교와 국방에 참신한 문관들을 등용하고 한어(漢語)를 가르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리고 배우려는 자들에게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같은 관련 서적들을 많이 발간하여 인재육성에 활용하여야 한다고 선조(先祖)에게 주청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1594년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복명한 뒤 병조좌랑에 제수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가 곧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안악현감에 제수되고, 이듬해 병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장령 겸 지제교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헌납, 홍문관수찬, 시강원문학, 사간원사간, 종부시정, 승정원동부승지,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심유경(沈惟敬)이 강화회담을 그르치고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올 움직임이 있음을 알렸다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예조참판으로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남원에 갔다. 양원은 왜적이 성 가까이 근접하자 승전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먼저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서숙(庶叔) 기생(己生)에게“도적이 이미 남원 십리 밖을 침범하였으니 머지않아 포위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소자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비장한 편지를 아버지에게 올린 뒤, 왜군과 항쟁하다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양원이 조정에 돌아가 당시의 상황을 전하자 선조는 예조판서를 증직하였고, 뒤에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를 더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3등(宣武功臣三等)에 녹훈되었고, 내성군(萊城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동국문헌비고》예문고에《현산집》은 전해지지 않고,《현산실기》에 수록된 약간의 시문이 전한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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