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인물
분 류 현대인물
정훈모(薰謨)


 


 

문익공파 30세(1868~1943)

公은 1868년 11월 1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남리에서 부친 인의(寅義)와 모친 경주이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우현(虞絃), 호는 단재(檀齋)라 하였고, 동래정씨 문익공파(익암파) 30세손이다. 후손들의 말을 빌면,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장신이며, 외모도 준수했다고 한다.

- 관직 -
1899년 희릉(禧陵)참봉에 임명되었고, 1906년 평북 용천(龍川)군수, 1907년 충북 영춘(永春)군수를 지내고 정삼품까지 올랐다.

- 사회운동 -
公이 연서하여 충남 유생들이 1902년 학문과 예에 힘쓰는 모습이 쇠퇴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올린〈헌의서(獻議書)〉를 필두로,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에 입회하여 애국계몽운동에 뜻을 두고, 이듬해에는 이종일, 이준, 주시경 등과 함께 광무사(光武社)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8년에는 기호흥학회에서 설립한 기호학교(畿湖學校)에 찬무원으로 활동하였다.

- 종교생활 -
公은 평소 종교와 수행에 관심이 많아 선가(仙家)서적들을 탐독하였고, 고향 오성산(五星山, 현 오서산, 해발791m)의 정결한 곳에 터를 잡고 단군위패를 세워 분향예배를 올리며 수도를 해왔다. 1908년 나인영(나철로 개명)이 대일외교차 도일할 때 동행하여 우연히 백두산 계열의 도인 두일백을 만나 도맥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고려 중기 이후 맥이 끊겼던 민족고유의 신교(神敎)를 중광(다시 일으킴)하고서 정선(鄭選)으로 개명한다. 公은 단군교 포교의 사명을 띄고 밤낮으로 누구보다도 단군교를 일으킬 연구에 전념한 인물로 당시『대한매일신보』에까지 소개된 바 있다. 公은 1910년 북부지사교 자리에 올라 서울 북쪽 지역의 포교를 전담하게 되었으나, 1910년 10월 단군교가 대종교로 개칭할 때 대종교의 ‘종(倧)’자가 임금의 휘자라는 논쟁이 일어났고 단군교명 고수를 명분으로 나철과 노선을 달리하기에 이르렀다.

- 저술활동 -
公은 1937년 일제에 의해 종단이 강제해체되기 이전까지 저술활동에 주력하여,《단군교약장(檀君敎約章)》(1914),《단군교총본부일기(檀君敎總本部日記)》(1915),《단탁(檀鐸)》(1921),《성경팔리(聖經八理)》(1921),《셩경팔리》(1926),《김선생염백기(金先生廉白記)》(1924),《천을선학경(天乙仙學經)》(1935),《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1937),《신교총화(神敎叢話)》(연도미상) 등 많은 종교서적을 펴냈다. 민족경전으로 알려진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성경팔리)의 3대 경전 체계를 세운 실질적인 장본인으로서 한국종교사 서술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름아이콘 정원종
2013-01-07 13:45
위 본문의 [부친 인의(寅義)]를 부친 인희(寅羲)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기미보 13권夜(55쪽뒤)외 寅羲공의 사마방목 모두 羲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위 관직 1907년을 1906년으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국역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광무10)  

 8월 12일(병자, 양력 9월 29일)에 영춘 군수에 임용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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