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선(復先 )
1658~1719 자(字)는 양중(陽仲)이고, 부친은 재한(載漢), 생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병조좌랑(行兵曹佐郞) 재해(載海)이다. 부인은 군수 서필성(徐必成)의 딸 숙인(淑人) 연산서씨(連山徐氏)이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총명하여 예습까지 알아서 하였다. 문예(文藝)가 날로 성취되어 1687년(숙종13) 식년시 진사 3등 12위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에 제수되어 나아갔으나, 간신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의 흉계로 인현왕후가 사제에서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예도감감조관(禮都監監造官), 장원서별제, 금부도사(禁府都事), 전주판관, 협천군수,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여산부사, 광주목사, 공조정랑,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전주판관 시절 명목에도 없는 세금을 거두던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나아간 임지(任地)마다 고을의 병폐(病廢)들을 고치는 데 힘썼으며,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구휼(救恤)하는 데 힘쓰고, 세금을 아껴써서 고을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조정에 훌륭한 관리로 이름이 올려졌다. 나주목사 때 병으로 임지에서 돌아가시자, 상(喪)을 치르는 날 다스렸던 고을 전주·여산·광주·나주 백성들이 곡(哭)을 하며 끊임없이 따랐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으며, 묘는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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