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敍)
생졸년 미상(未詳) 호(號)는 과정(瓜亭), 지추밀원사 항(知樞密院事沆)의 아들, 음보(蔭補)로 내시 낭중(內侍郎中)에 이르렀고, 공예대후(仁宗妃) 여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1151(의종5) 폐신(嬖臣) 정 함. 김존중의 참소로 고향 동래에 장류(杖流)될 때 의종(毅宗)으로부터 곧 소명(召命)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후 오래도록 소명이 없자 연군(戀君)의 정(情)을 가요(歌謠)로 읊었다. 이를『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삼진작(三眞勺)』이라 했고 후세사람들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고 이름 지었다. 1170년(의종24) 용서를 받고 다시 기용되었다. 묵죽화(墨竹畵)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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