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괄(佸)
1435(세종17)~1495(연산군1)
자(字)는 경회(景會)이고, 영의정 창손(昌孫)의 아들이다. 처음 음관(蔭官)으로 보직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이르렀으며, 1465년(세조10) 문과에 합격하고, 성균 사예(成均司藝), 사헌부장령, 대사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77년(성종8)정유년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배수되고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돌아와서는 대사헌·이조참판이 되고, 수개월 내에 가자(슨진)되어 판서가 되었다가 곧 한성 판윤(漢城判尹)·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85년(성종16)에 특별히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487년(정미)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사(喪事) 치르기를 검소하고 예절이 있게 하였으며 불교의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1488년(무신) 형조판서가 되어서는 법대로 하고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겨울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법에만 구속되지도 않고 너무 세밀함을 잘한다고 하지도 않으니, 자연 지위와 명망이 중(重)하여 도내가 숙연하여졌다.
1492년(임자)에 명나라 서울에 가서 황태자 책봉식을 축하하고, 이듬해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특별히 평안도 관찰사를 제수하였는데, 공(公)이 늙고 병들었다고 사퇴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온 도내가 피폐하기 때문에 특별히 경을 보내는 것이니, 누워서 다스려도 백성이 스스로 편안해질 것이다.’하였다.
1495(연산1) 을묘년에 중국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서 왕을 책봉하고 고명(誥命)을 내렸는데, 왕이 공(公)을 특별히 불러 우의정에 임명하고 사은사(謝恩使)에 제수(除授)하니, 중국 서울에 갔다 돌아오다가 칠가령(七家嶺)에서 사망하였는데, 시호를 공숙(恭肅)이라 하였다. 일을 하는데 견고(堅固)함을 공(恭)이라 하고, 마음가짐에 결단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公)이 아들 종보(宗輔)에게 말하기를, ‘평생에 공덕이라고는 적을 것이 없으니,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수명은 61세이다. 공(公)은 기상이 엄준(嚴峻)하여 대신의 기풍이 있으니, 바라보기에도 늠름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하기를 견고 확실하게 하니 누구도 동요시킬 수 없으며 또 권도(權度:쫓아야 할 규칙이나 법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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