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령(龜齡)
생졸년 미상(未詳) . 호(號)는 삼수정(三樹亭),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해(諧)의 아들,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1424(世宗6)년에 결성현감을 제수(除授)받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후세 사람들로부터 세종조(世宗朝)에 좋은 관리라고 칭송받았으며, 용궁현 완담사에 주벽(主壁)으로 제향(祭享)되었다. 논어(論語)에서 이르기를『어진사람은 후손에게 복을 끼친다』라고 했는데 상산군부인(商山郡夫人) 박씨 사이에 7男5女를 두었는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영의정 광필을 필두로 13인의 재상(宰相)과 수많은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배출되었다. 공(公)의 선정관안(善政官案)에“행실이 공순근검하고 올바르게 정사를 펼쳤다”(行己廉謹恭儉質直)한 것처럼 목민관으로서 닦으신 공적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1750년(영조)부터 신운(神韻)이 있어 1425년 퇴임을 앞두고 심은 회화나무 아래서 5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기리며 신목제(神木祭)를 지내면서 공덕(功德)을 기리고 있다. 그 후 결성향교(結城鄕校)를 창설하고 이듬해 사직했다. 덕행이 있어 문종(文宗)이 형조참의를 추증(追贈)하고 중종(中宗)때 증손 광필이 영의정을 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구담에서 용궁 고을의 포내 별실(예천군 풍양면 별곡리)에 터를 잡고 살며 마을 어귀에 손수 회화나무 3그루를 심고 곁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삼수정(三樹亭)이라고 하고 자호(自號)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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