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미(世美)
1583∼1624 자(字)는 사원(士元), 호(號)는 동와(東窩). 참판 협(恊)의 아들, 1606년(선조39) 진사가 되고, 2년 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도사(都事)가 되었다. 1608년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당시 호남의 유생 고경리(高敬履)와 성혼(成渾)이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의 4현(賢)의 도를 이어받아 정주학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원을 청할 때, 이언적(李彦迪)을 논외로 함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깎아내리는 처사라고 그 부당함을 상소(上疏)하였다. 1611년(광해군3) 수찬을 거쳐 정언· 도호부사(都護府使)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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