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협(東俠)1
생몰년 미상 조선중기 의병. 자(字)는 개부(蓋夫)이고, 호는 모와(慕窩)이다.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곤(坤)의 6세손이며, 상호군(上護君) 건(健)의 아들이다. 외조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외조 서경덕에게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열두 살에 부친이 돌아가심에 삼 년간 정성껏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 참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7)에 모친의 병이 위중하자 하늘에 눈물로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모친의 병을 다시 회생시켰다 한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는 등 나라가 위급한 때에 이르자, 숙부 되는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에게 창의(倡義)의 뜻을 전하고, 큰아들로 하여금 병중인 어머니와 마이산(馬耳山) 지천리(枝川里: 현 운천리)로 피신하도록 하고, 숙부 및 둘째 아들과 함께 가동(家童) 수십 명을 거느리고 전응철(全應哲), 전응종(全應鐘) 형제 및 신성식(辛成式)과 더불어 군량을 모아, 여산(廬山) 모의소(募義所)로 가서 과천으로 행하였는데 이미 청(淸)과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순국하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며 되돌아왔다.
그 후 전라도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의 천거로 예빈시정(禮賓寺正), 사복시정(司僕寺正)이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전라북도 진안(鎭安) 영모사(永慕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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