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형(志亨)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효자로, 호는 벽계(碧溪). 1868년에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이후 그의 손부(孫婦)와 증손부(曾孫婦)도 열녀로 알려져 정문이 내려졌다. 그는 조선 순조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럽고 남달리 총명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눕자, 여러 방면으로 약을 구하고 밤이면 마당에서 아버지가 낫기를 간절히 빌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禮)를 다하여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학자들이 추천하고, 관찰사 서상정(徐相鼎)이 조정에 아뢰어, 1868년 4월에 정문이 내려졌다.
그의 손부(孫婦)인 김제 조씨(趙氏)는 타고난 성품이 정숙하고 규범을 잘 지켰다. 남편인 성균 진사(成均進士) 정환석(鄭桓奭)이 병들어 모든 약이 소용없자, 손가락을 셋이나 잘라 그 피로 목숨을 잇게 하고, 허벅지의 살을 베어 약을 달여 먹이니,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7년 동안을 더 살았다고 전한다. 관찰사 윤영신이 조정에 아뢰어 정문을 세웠다. 그의 증손부 경주이씨(李氏)는 통덕랑(通德郞) 정방섭(鄭邦變)의 아내로, 시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눕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올렸다. 또 남편이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자,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고 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빌었다. 그 동안 열 번이나 손가락을 찢고 세 번이나 허벅지의 살을 베어 정성을 다하였다. 이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뒤를 따랐다. 관찰사 이헌식이 조정에 아뢰어 정문을 세웠다.
현재 경남 김제시 장화동에‘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지평 정지형지려(孝子 贈通訓大夫司憲府持平鄭志亨之閭)’와‘열녀 성균진사 정환석지처 의인김제조씨(烈女成均進士鄭桓奭之妻宜人金堤趙氏)’그리고‘열녀 통덕랑 정방변지처 공인경주이씨지려(烈女通德郞鄭邦變之妻恭人慶州李氏之閭)’가 모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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