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흠지(欽之)
1378~1439 자(字)는 요좌(堯佐),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감찰대부 양생(良生)의 손자, 부(符)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음보(蔭補)로 지평(持平)이 되고, 1408년(태종 8) 박은(朴誾)을 민무질(閔無疾)의 일파라여 탄핵하다 장흥(長興)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 나와 141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이조와 병조의 정랑(正郞), 좌헌납(佐憲納)을 거쳐 1416년 장령(掌令)이 되었을 때, 좌의정 박 은과 청성부원군 정탁(淸城府院君鄭擢) 사이에 노비 문제로 송사(訟事)가 생기자 다시 박은을 탄핵, 그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으로 등용, 이어 집의(執義). 지형조사(知刑曹事), 동부대언(同副代言), 지신사(知申事) 이조참판 들을 역임. 1430년 대사헌에 승진,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433년 황보인(皇甫仁) 등과『계축진설(癸丑陳設)』을 찬진(撰進), 이어 충청·전라·경상 삼도 도순무사(三道都巡撫使)가 되어 주군(州郡)의 성(城)터를 심정(審定)했다. 1435년 함길도 도관찰사(觀察使)로 부임, 새로 설치된 4진(陣)의 수비와 민심 안정에 공헌하고, 1437년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다.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천문(天文)에도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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