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필동(必東)
1653∼1718 자(字)는 종지(宗之). 의주부윤 경업(慶嶪)의 증손으로, 태구(台耉)의 아들이다. 민정중(閔鼎重)의 문인이다. 1684년(숙종10) 정시문과(庭試文科) 에 병과로 급제, 1690년 영산현감으로 재직 중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699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기용 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이때 허균(許筠)의 시를 간행하여 죄를 입은 박태순(朴泰淳)이 외직에 임용된 것에 대한 인사행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 뒤 금산군수를 거쳐 1705년 장령에 다시 기용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정언으로서 종친의 정치 간섭배제, 세자의 정치참여 요청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1710년 당쟁(黨爭)을 일삼은 죄(罪)로 파직되었으나 1712년 장령(掌令)으로 복직(復職) 되었으며, 그 뒤 동부승지·경주부윤을 거쳐 1717년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솔직하고 성실하였으며,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부하들을 엄숙히 단속하였다고 한다. 1716년 병신보(丙申譜)를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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