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량(希良)
1662년∼1751년 자(字)는 국경(國卿)이며, 종지(宗智)의 아들로 다른 이름은 희관(希寬)이다. 제주도 구좌읍 상도리에서 태어났다. 1680년(숙종6) 제주안핵 겸 순무어사(濟州按覈兼巡撫御使) 이증(李增)이 제주도에 들어와 시취(試取)를 하였는데, 이 시험에 시제(詩題)가 승부부해론(乘桴浮海論)이었는데 혼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15로 급제하여 약관의 나이인 19세에 출사하였다.
경상북도 문경의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역임하였고, 1684년(숙종10)에는 제주교수(濟州敎授)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돌아왔다. 1740년(영조16)에는 회방(回榜)을 맞아 병조판서로 승직(陞職)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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