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모(憲謨)
1852∼1914 조선 말기 유학자이다. 자(字)는 성빈(聖彬), 경익(景翼), 호는 죽파(竹坡), 출신지는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임천면(林川面: 옛 嘉林里)이다.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의 후손이며, 증조는 기풍(基豊), 조부는 봉조(鳳朝), 생부는 인섭(寅燮)이다. 생외조부는 전의(全義) 이긍식(李肯植)이다. 중부(仲父) 인소(寅熽)가 후손이 없자 그를 입사(立嗣)하여 대를 이었다. 어머니는 광산(光山) 김상혁(金相爀)의 딸이다. 처부는 풍양(豊壤) 조복영(趙復永), 풍천(豊川) 임화준(任華準)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독서를 좋아하였다. 장인 조복영의 도움으로 수 년 동안 수학하여 학업이 일진하였다. 당시의 이름이 있던 상서(尙書) 정기회(鄭基會), 우상(右相) 정범조(鄭範朝), 찬성(贊成) 이유승(李裕承) 등이 장래를 기약할 만하다고 여겼다. 고종 때 갑오정란(甲午政亂)이 일어나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끊고 가림리(嘉林里) 성흥산(聖興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이때 석람(石覽) 김용규(金容圭), 만송(晩松) 유기오(柳基五), 만림(晩林) 조동범(趙東範) 등 문사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다.
향년 63세에 사망하였다. 아들은 진용(鎭龍), 진구(鎭龜), 진학(鎭鶴), 진일(鎭一)이다. 묘지는 가림리(嘉林里) 갑원(甲原)이다. 문집으로《죽파선생문집(竹坡先生文集)》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