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상(弘祥)
1700∼1729 자(字)는 의백(毅伯). 예조판서 형익(亨益)의 아들이다. 1726년(영조2)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때 아버지 형익으로부터 당쟁(黨爭)에 가담하지 말도록 자중(自重)하라는 훈계를 받아 벼슬을 사임하고자 하였으나, 1728년에 탕평을 이루고자 하는 왕의 특명에 따라 부수찬(副修贊)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상소上疏)를 올려, 당쟁(黨爭)이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라는 것을 적시(適時)하면서 보다 강력한 탕평책(蕩平策)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당쟁에 의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4대신 등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정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다시 강진에 이배(移配)되었다. 그 뒤 탕평책이 점차 이루어지자 그도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객사(客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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