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익(亨益)
1664~1737 자(字)는 시해(時諧), 지평(持平) 제선(濟先)의 아들. 1687년(숙종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04년(숙종30) 유생(儒生) 160여 명과 연명(連名)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의 사우(祠宇)를 건립할 것을 상소, 처음으로 궁중에 황단(皇壇)을 세우게 했으며, 참봉(參奉), 세마(洗馬) 등을 거쳐 금구현령, 김제군수를 지냈다.
17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721년(경종1)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김해(金海)에 유배 되었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대사간에 등용,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 1727년 도승지. 대사성. 대사헌을 역임, 이해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파직당했다. 후에 등용되어 평안도 관찰사에 보직되고 예조판서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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