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용(憲容)
생몰년 미상(未詳) 자(字)는 익지(翼之)이고, 서울 출신으로 1819년(순조19)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 32위로 합격하였다.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1828년(순조28)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거쳐 1831년(순조31) 상의원(尙衣院) 별제(別堤)를 지내고 이듬해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와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고, 1833년(순조33) 강원도 금성현령을 지냈다.
1838년(헌종4) 평안남도 덕천군수를 지내고, 1844년(헌종10) 충청도 청주목사, 1857년(철종7)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좌승지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859년(철종10) 한성부 좌·우윤(漢城府左右尹)을 지냈다.
1863년(철종14)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제수 되었다. 1864년(고종1) 년70(年七十)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되어 이듬해 병조참판, 1866년(고종3)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백관가(百官加)를 친수(親授)받고 한성부 판윤을 거처 공조판서가 되었다. 1874년(고종11) 년80(年八十)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되고 다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16)에는 85세로 진사(進士) 회방인(回榜人)이었으므로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발탁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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