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화(致和)
1609~1677 자(字)는 성능(聖能), 호(號)는 기주(棋洲). 영의정 광필(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광성(廣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영의정 태화(太和)의 동생이며, 좌의정 지화(知和)의 4촌이 된다.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남씨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얻지 못하여, 형 태화의 막내아들 재륜(載崙)을 입양하였는데,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관계가 되었다.
1628년(인조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문한(文翰)의 관직을 거치다가, 1635년부터 1642년까지 동래부사가 되어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주로 3사의 여러 청 요직을 역임하였다. 1638년 충청도암행어사로, 이듬해에는 함경도암행어사로, 1641년 황해도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고, 1640년에는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때 세자가 서양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45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소위 강옥(姜獄: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에게 죽음을 내린 사건)때 패초(牌招 :왕명을 받아 승지가 신하를 부름)를 올리지 않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1년 반 동안 폐고(廢錮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는 처분)되어 있다가 1647년 말에 평안도관찰사로 승진, 기용되었다. 평양에 부임한 지 1년반 만에 아버지의 병으로 잠시 사직하였다가, 1650년(효종1)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고, 뒤이어 경기도관찰사, 도승지, 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667년(현종8)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六曹)의 판서와 대사헌을 두루 역임하면서, 1660년과 1664년 동지사(冬至使)로 두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정책 대결이 표면화되었던 때여서 중도적 노선을 지키고자 하였던 그와 그의 일문(一門)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무려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겪다가, 형 태화가 영의정을 내놓고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으면서 우의정 겸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 형 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다. 1677년 9월 중추부영사로서 별세하였다.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축출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중도적 노선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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