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익(弘翼)
1571~1626 자(字)는 익지(翼之), 호(號)는 휴옹(休翁),휴헌(休軒),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시정(寺正) 사신(思愼)의 아들로 1589년(선조22) 생원이 되고, 159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별과(別科)로 급제, 검열, 봉교를 거쳐 이듬해 주서(注書)가 되었다. 사서(司書),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에 올라 정인홍(鄭仁弘)이 성 혼(成渾)을 탄핵하자 이를 극력 변호, 정인홍을 공격하다가 단천 채은관(端川採銀官)으로 좌천, 이어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을 지냈다. 1608년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수찬(修撰).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1612년(광해군4) 성천부사를 거쳐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 극간(極諫)하다가 진도(珍島)에 유배, 이어 종성(鍾城). 광양(光陽) 등지로 이배(移配)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풀려 나와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진도 봉암사(鳳巖祠)·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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