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선(是先)
1650년∼1717년 자(字)는 백초(百初), 부친 증 이조참판 재해(載海)와 모친 절도사(節度使) 김일(金逸)의 딸 증 정부인(贈貞夫人) 안동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정선군수 증 판서(贈判書) 김자남(金自南)의 딸 광주김씨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라 청렴하고 신중하고 부지런하고 훌륭한 용모에 영특한 재능까지 다섯 가지 덕을 모두 갖추었다. 관직에 임할 때마다 여러 번 사양한 끝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나아가곤 하였다.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아가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장례원사평(掌隷院司平), 황해판관, 김제군수, 선산부사, 청주목사· 수원부사, 충주목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한 후, 황해도관찰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제군수로 있을 때는 법에 따라 공정하게 다스렸으며,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엄격하여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은 두려워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마음으로 따랐다. 청주목사로 있을 때는 큰 흉년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들어 하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써 고을에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런 선정으로 인해 부임했던 고을마다 그를 기리는 거사비(去思碑), 마애비(磨崖碑) 등이 세워졌으며, 이조(吏曹)에서 선정을 베푼 수령을 보고할 때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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