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룡(彦龍)
1554~? 호(號)는 노봉(老峰). 인각(麟角)의 아들, 그의 조상은「충(忠)과 효(孝)는 전가(傳家)의 규범이요, 밭 갈고 글 읽는 것은 몸을 지키는 규정(規定)」이라는 시를 지어 두고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이같이 엄한 가훈 속에서 자라던 그는 어릴 적부터 글 읽고 배우면서 무술을 연마하였다. 청년이 되어서는 선비의 자질을 능히 갖추고 또한 비범하고 용력이 대담한 무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문무의 재질을 나라에 봉공하려던 참에 직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첨사 정발장군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성으로 침공한다는 급히 의병을 모아 동래성으로 향했다. 기찰정에 다달아 피난민들에게 들은 즉 동래부사 송상현공이 전사하고 성은 왜병들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에 대성통곡을 하였다.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동래성이 함락되자 인근 소산역(蘇山驛)에 피신하였고 지원하러 오던 밀양부사 박진(朴晋)도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공(公) 등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소산역으로 가서 관군들과 합세하였다. 왜군들이 소산역으로 밀려오자 좌병사 이각은 관군들을 이끌고 언양성으로 다시 후퇴하고 울산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공(公)은 후퇴만 거듭하는 이각부대에서 이탈하여 이 고장 쪽으로 회군하면서 유격전을 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난민을 도와 이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육지에서는 왜군들과 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의병들은 고장의 어선을 징발하여 해안을 누비면서 왜선들을 격멸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렇게 해전이 익숙해진 정장군은 1593년 들어 의병들을 데리고 이순신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종군했다. 이들은 관군과 함께 통영 앞바다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렇듯 육지에서 바다에서 적과 큰 전투에 참전하고 있던 어느 날 고향에서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공(公)은 평소 충효가 대단한 인물로 한편으로 나라를 위해서 봉공하면서 효 또한 버릴 수 없었다. 싸움의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3백리 길을 밤낮 없이 달려 어머니 옆으로 왔다. 거의 의식불명 속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겨우 잡고「지금 나라가 위태롭고 상감께서 곤욕을 당하시느라 조석으로 방려할 수 없거늘 너는 어찌하여 전장에서 되돌아 왔느냐」고 노했다.
공(公)은 고장에서 다시 의병들을 모아 그 대장이 되어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왜군들을 곳곳에서 죽이고 식량을 빼앗아 많은 난민을 구제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고, 인조 14년(1636) 나라에서 소명했으나 나가지 않고 있다가 이듬해 84세로 별세했다. 조정에서는 창의토적의 큰 공을 찬양하고 통정대부 사복시직장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훈으로 훈록하였다. 또 이충무공 휘하에서 왜군들의 섬멸에 많은 공을 세운 정인정(삼촌)은 임란 뒤 향리로 돌아와 향풍을 바르게 이끌면서 살다 여생을 마쳤다. 이 두 분은 모두 사정단소에 봉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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