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상(一祥)
1721~? 자(字)는 여성(汝成), 증조는 재후(載厚)이고, 조부는 제선(濟先)이다. 부친 판서 형복(亨復)과 모친 민항(閔恒)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74년(영조50)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승지, 호조참판, 비변사당상,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청나라에서 전임 진주사(陳奏使)가 가지고 간 주문(奏文) 내용의 잘못을 지적당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 사은(謝恩) 겸 진주사를 보냈는데 이때 부사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3년(정조7) 종부시제조 재직 시절《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팔고조도(八高祖圖)》등을 간행하였는데《선원계보》에 정안옹주(貞安翁主)부터 정화옹주(貞和翁主)까지를 실수로 다음 항렬에 잘못 기록하였다가 관직을 삭탈(削奪) 당하였다가 그해 복직되어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사헌부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84년(정조8) 이때 어제시(御製詩)를 태묘(太廟)의 망묘루(望廟樓)에 걸었는데, 배종(陪從)하여 받들 즈음에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의정 김익(金熤)이 파면하기를 청하여 호조판서에서 파직되었다가 곧 유임되었으며, 도감도제조(都監都提調)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승진)되어 영접도감제조(迎接都監提調),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올랐다. 1785년(정조9) 지경연사(知經筵事), 다시 판의금부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786년(정조10) 의정부좌참찬,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89년(정조13) 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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