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유(彦儒)
1687∼1764 자(字)는 임종(林宗), 호(號)는 우헌(迂軒). 참봉 운서(雲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정흥(李鼎興)의 딸이다. 1721년(경종1) 유학(幼學)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726년(영조2) 예조좌랑에 올라 강원도일대 국릉(國陵)의 관리 상태를 살폈는데, 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평창과 정선의 군수 등을 처벌하게 하였다. 1744년에 다시 헌납(獻納)으로 임명되어 왕이 부당하게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처벌하는 일을 규탄하다가 노여움을 사 삭직(削職)당하는 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1748년에 경상도의 영해부사로 발탁되어 지방행정의 모순(矛盾)을 시정한 결과 왕으로부터 포상받았으며, 1758년 왕으로부터‘정직하고 청렴(淸廉)하여 보배로운 인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는데, 그의 성격은 꾸밈을 싫어하고 구차하게 화합하지 않고 소신대로 추진하였으며, 직언(直言)을 잘 하였다. 이와 같은 성행(性行)이 뒷날까지 인정되어 1796년(정조20)에는 청백리(靑白吏)로 추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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